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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a Pee 오줌으로부터


나는 어렸을 때부터 오줌에 대한 강박이 있다.  어딜 가든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부터 파악해야 하고 이동하기 전엔 화장실을 몇 번씩 다녀와야 하고 멀리 이동하는 것을 꺼린다.  오줌에 대한 강박은 내가 최초로 인지한 불안이었다.  그 후로도 많은 강박과 불안이 생겨났다. 오줌은 제자리를 조금만 벗어나도 더럽고 역겨운 취급을 받는다.  나의 불안과 강박도 그랬다. 불안함을 원동력 삼아 계획을 세우고 일을 처리해 나갈 때는 불안이 제자리에 있는 것 같은 취급을 받았지만, 나의 불안은 대부분 제자리를 벗어나 이런 저런 강박을 만들어냈다. 모든 면에서 ‘잘’, ‘제대로’, ‘완벽하게’ 해내야 할 것 같았고, 더 잘하지 못하는 자신을 비난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하지 말라는 것만 하고 싶었고, 하라는 것만 골라서 안 하고 싶었다.  사회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나와 원초적인 내가 극단의 끝에 앉아 시소질을 하는 것만 같았다.   어느샌가 그 시소질을 관찰하는 게 흥미로워졌다. 이 불안의 근원을 파헤치려고 닥치는 대로 읽고 생각하고 글을 썼다.  파악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인 불안이 존재하는 곳은 생각으로 가득 차있다.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나온 나의 생각이 행위를 만들고 나의 알고리즘을 만든다.  불안의 시소질이 만든 분열된 신체로 설명되는 작업들은 최초의 불안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모든 것은 오줌으로부터.
Cogito와 Period


선은 글이 되기도 하고 이미지가 되기도 한다.  지금과 같은 시대에는 점이 이미지를 만든다고 하는 것이 더 논리적일지도 모르겠다.  실타래처럼 뒤엉킨 생각이 적절한 단어와 구조를 가진 문장으로 풀려나갈 때 우리의 머릿속은 비로소 언어로 가득 찬다. 느낌에 더 가까운 생각 속의 언어들을 붙잡아 두고 생각의 논리를 정연하기 위해 기록한다.  생각의 빠르기를 따라잡느라 빠르게 휘갈기다 보면 글자의 부정확한 모양 때문에 글은 그 기능성을 곧잘 잃어버리곤 한다. 그저 선이 되어버린 글은 점으로 닫힌다. 한 문장을, 한 단락을, 길고 긴 과정을 점으로 닫는다.  아직 죽음을 맞이하지 못한 ‘나’는 점으로 닫힌 사유의 잠정적 가설을 다시 선으로 열고 또 다른 이야기로 가득 찬 생각의 끝을 점으로 닫는다.

“점은 언어에 소속되며, 침묵을 의미한다.  끊임없이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에 점은 중단, 즉 부재의 상징이며, 동시에 점은 한 존재에서 다른 존재에 이르는 교량 역할을 한다. 이것이 문장에서 점이 지니는 내적인 의미이다.”¹
 
침묵은 생각의 외연이다.  아직 글이 되지 못한 내부의 소란스러운 생각이 ‘나’를 통해 드러내는 그 자신의 형태이다.  아직 온전한 이름으로 존재하지 못해 수많은 부연 설명이 필요한 것들과 나의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른 생각들을 자기검열하는 모습이다.  마땅치 않은 느낌과 부당하다는 주관적인 느낌을 이해받기 가능한 영역의 사고와 보편적인 언어로 전환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다.  온점의 모양으로 침묵한다는 것은 고요하지만 소란스럽다.  정돈되지 않은 생각들은 침묵 속에서 글이 될 준비를 한다.  선이 이미지로 옮겨지며 생각은 글이 된다. 쏟아져 나온 글들은 서사를 만들고 다양한 모습으로 거대하게 확대 된 온점을 침범하고 글들끼리 뒤엉키면서 ‘침묵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무엇이 침묵인지 그리고 무엇을 침묵하고 있는지를.